일주일째 야근으로 몸이 죽어나지만, 그래도 이 감동이 사라지기 전에 짧게라도 몇 자 적어야 후회하지 않을 것 같다.

 

  한달쯤 전에, 네가 곰티비 클래식에 나온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그 때의 기분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 지 모르겠다. 그저 단순히 네게 고마웠고, 또 네가 걱정되었다고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하니까.

 

  너는 이스포츠판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너는 '레전드'라는 표현이 부담스럽다며 스스로를 '퇴물'이라 칭하지만, 스타판을 지켜본 이들이라면 네가 '스타판의 레전드'를 넘어 '이스포츠판의 레전드'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거라 생각한다.

  흔히 스타판을 만들고 키운 제 1 공신으로 임요환이 언급되지만, 그 큰 판을 만들고 키우는 데 어찌 임요환만 공헌했으랴.([임]의 공헌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임요환 외에도 황형준, 엄재경, 정일훈, 김태형, 전용준 등등 스타판을 만들고, 키우고, 꾸며가며 뒷바라지 했던 이들이 있었고 너도 그 '공신'중 한명이었다.

  너는 아주 오랫동안 '저그의 수장'이었고, 스타판이라는 스토리의 '주인공'이었으며, '이슈 메이커'였고, 수많은 팬들을 스타판에 유입시킨 '팬덤의 중심'이었으며, 무엇보다도 '뛰어난 선수'였다. 너는 폼이 많이 떨어졌을 때에도 스타판에 남아 '개그 소스'로까지 쓰였고, 스타판이 끝나는 순간까지도 너는 스타판이 요긴하게 써먹는 '소재'였다.

  너는 네가 할 수 있는 모든것을 다 해 스타판에 이바지했다. 아니, 너의 모든것, 그 하나하나가 스타판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보는게 맞겠다. 네가 했던 말이나 행동들 전부는 너의 의도와 상관없이 스타팬들의 유희를 위해 쓰여졌고 네가 걸었던 행보는 네 목적과 상관없이 스타판의 스토리 구성을 위해 쓰여졌다. 스타판에 존재했던 팬들도, 스타판의 이야기를 써내려 가던 이들도 모두 너를 뜯어먹고 너를 쥐어짜 마시며 즐기고, 살아갔다. 네가 받는 상처나 짓밟힌 너의 꿈과는 상관없이... 그것은 스타판이 끝날 때 까지도 이어졌다.

 

  그저 네 팬이었던 나도 계속되는 폭력에 마음이 너덜너덜해 졌을 때가 있었고 끝나지 않는 조롱에 정신이 산산조각났을 때가 있었다.

  하물며 너는 어땠을런지.

 

  그럼에도 너는 폭력과 조롱을 견디며 스타판에 남아줬다. 그것은 못다 이룬 우승에 대한 한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네가 언젠가 말한대로 스타판의 '선구자'로서의 책임감 때문이었을까.

  엄밀히 따지자면 신주영 이기석 김도형 김창선 등을 1세대로 봐야 하지만, 언제부턴가 스타판 1세대를 이야기할 때 임요환, 홍진호부터 꼽는 일이 많아졌고 너는 소위 '올드'로 불리던 시점부터는 그 판의 '1세대'이자 '선구자'로서, 그리고 그 판을 지탱해 온 '버팀목'으로서 스타판과 후배들을 위해 무언가 해야한다고, 하고 싶다고 생각했던것 같다.

 

  신한 시즌1때까지만 해도 너의 부활을 기대하고 네 제3의 전성기를 기대하던 이들이 낙담하고, 너를 등지고, 이제 홍진호는 끝났다며 더이상 네게 기대하지 않던 때가 2007년. 폼은 떨어질때로 떨어지고, 김철과의 보이지 않던 트러블, 출전도 제대로 못하는 바람에 그나마 방송경기에 대한 감각도 무뎌지면서 세상의 모든 욕이 너를 향하던 시절. 옆에서 지켜보는 입장에서도 견디기 힘든 모욕감을 참아내면서 너는 버텼다. 무기력하고 의욕이 없을 때도 너는 '거기서' 버텼고 키보드와 마우스를 놓지 않았다. 한참 후배들, 어린 동생들을 선임으로 모셔야 하는 줄 뻔히 알면서도 너는 '선수로서의 마지막 도전'을 위해 공군에 입대했고 너보다 월등한 후배들과 맞서 싸웠다.

  아마추어인 내가 봐도 07년 08년의 너는 '답이 없는' 실력이었고 네가 상대해야 할 후배들은 압도적인 피지컬과 기량을 자랑했다. 그들에게 도전하는건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다. 그 즈음에는 그 누구도 너의 승리를 기대하지 않았다. 나처럼 맹목적으로 너를 응원했던 팬들도 있었지만, 그들도 아마 알고 있었을 것이다. 네가 이길 수 있는 선수는 없다는 걸. 널 응원하는 나를 내 이성은 매번 "이제 그만 포기해, 더이상 상처받지 말고." 하며 비웃었었다.

  너를 응원하던 나도, 너의 팬들도, 너의 팬들이었던 자들도, 너의 팬들이 아닌 자들도, 너의 안티였던 이들도 모두 너의 선수 생명이 끝났음을 알고 있었던 그 때, 너는 정말 몰랐을까? 냉정히 말해 그 때의 네 실력이 어땠는지를.

  이영호라는 스타판 최고의 괴물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면서, 그리고 그 괴물과 호각세를 이루는 스타판 최고의 저그를 보면서도 너는 포기하지 않고 스타판에 남아 '도전'이라는 이름으로 부딪히고, 깨지기만 했다. 너는 이제 더이상 정상에 설 수 없음을 알면서도 불나방처럼 정상을 향해 달려들었다. 네 무모함을 비웃다 못해 더이상 지켜보는 이가 없었을 때 까지도.

  이 모든 일들이 정녕 네 개인적 욕심이나 한 때문이었을까?

 

  변변찮은 성적 없이 네가 벤치만 지키고 있었을 때, 많은 이들이 '떠나야 할 때를 알고 떠나는 이의 뒷모습은 아름답다'며 차라리 너의 은퇴를 종용하던 시절, 그 시절엔 한번씩 상상해보곤 했다. 네가 저그로서 정점을 찍었을 때, 혹은 비록 정규리그 우승 타이틀이 없기는 하지만 스니커즈배 우승 즈음 해서 은퇴하고 전설로 남았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네가 이렇게 조롱당하고 무시당하는 일 없이, 네가 원했던 대로 좀 더 명예로울 수 있었을까 하고. 그랬을런지도 모른다. 추억은 미화되기 마련이고 옛 기록은 우상화되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너는 볼 꼴 못볼 꼴을 다 보면서 스타판이 끝나기 직전까지 그곳을 지탱했다. 마지막까지 너는 안될 걸 뻔히 알면서도 까마득한 후배와 스타리그 예선에서 붙었고 이기기 힘들다는 걸 알면서도 은퇴경기에서까지 네 스타일로 네 경기를 했다.

  나와 비교도 안되게 능력있는 까마득한 후배들이 이전에 내가 있었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재주를 뽐내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심정을 안다. 그 허탈함과 굴욕감과 비참함. 그 누구도 나를 무시하지 않고 되려 나를 대접해 주지만, 내 스스로 뼈저리게 나의 한계와 현실을 알고 있을 때의 그 좌절감. 그러한 감정을 느끼면서도 그 자리에 버티고 서 있는다는 것이 얼마나 스스로 구차하게 느껴지는지도 안다. 그럼에도 너는 거기서 버텼다. 너는 네 자리에서 무언가를 해보려고 했고, 마지막까지 '선구자'로서의 책임감을 버리지 않은 채 끝까지 임요환 없는 스타판에서 맏형 노릇을 했다.

  그것은 너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니었다.

 

  네가 선수 생활 후반기에 까먹은 그 아까운 승률이나 네 폼이 떨어진 이후에 조롱받으며 싸잡아 평가절하 당한 너의 전성기적 실력을 생각하면 아쉽다는 생각부터 든다. 나도 이럴진대 '존경받는 게이머'가 되고 싶었던 너는 오죽할까.

  그럼에도 네 승률을 계속 까먹어가면서, 네 업적의 가치를 계속 상실해 가면서 도전했던 너의 목표는 무엇이었을까. 못 이룬 우승? 07년 이후의 네가 정말로 우승을 노리고 게임했을까? 최강자로 불리던 후배들을 이겨보겠다는 승부욕? 대체 너의 목표는 뭐였을까.

  생각해 보건대 너는 임요환이 그랬던 것처럼 후배들에게 무언가를 제시하고 싶었던 것 같다. 삼십대 프로게이머도 가능하다는 것, 삼십대가 되어도 여전히 도전하고 승부하는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그러나 그 길은 녹록치 않았고 삼십대 프로게이머로서의 너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네가 후배들에게 본보기가 되는 것이 아니라 되려 너의 모습을 통해 후배들이 좌절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될 즈음, 너는 GG를 선언했다. 그 선택 마저도 너를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후배들을 위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너는 후배들에게 어두운 미래를 보여주느니 그쯤에서 멈추는 걸 택했고, 이름뿐인 선수생활을 택하느니 차라리 은퇴를 택했다. 사실 눈 딱 감고 그 자리에서 케텝의 얼굴마담으로 있었더라면 너는 2년 정도는 더 안정된 수입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것이 수치스럽고 초라하다 생각되었을 수 있으나 네가 당했던 조롱과 멸시와 모욕에 비하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너는 하는 것 없이 자리를 차지하기 보다 재능있는 후배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케텝이 붙잡았으나 끝끝내 현역 선수고, 코치 자리고 거절했던 것도 아마 비슷한 맥락이었을게다. 너는 지쳤고,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다고 했지만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을거라 생각했고 그 생각은 네 은퇴경기를 보며 굳어졌다.

 

  은퇴 이후에도 너는 이스포츠판을 완전히 떠나지 않았고 여전히 어떤식으로든 게임을 했다. 누군가는 그것을 당연하다 여기겠으나 이스포츠 판에서 상처 투성이로 버텼던 너를 기억하는 내게는 눈물나게 고맙고 또 고마운 일이었다.

 

  2014년 여기는, 게임을 마약 취급하는 나라다. 여전히 기성세대는 물론 젊은이들 중 대부분이 이스포츠를 스포츠로 인정하지 않는 나라고, 여전히 프로게이머는 직업으로 인식되지 않으며 천대당하는 나라다. 너와 임요환을 비롯한 수많은 게이머들이 자신의 피와 땀과 눈물과 청춘을 바쳐 노력했지만 여전히 이스포츠와 프로게이머는 대접받지 못하는 나라다. '전 프로게이머' 타이틀을 달았다는 이유로 프로그램도 제대로 보지 않고, 너의 활약도 보지 않고 그저 '게임 폐인'으로 너를 폄하하는 악플들이 달리는 나라다.

  그런 나라에서 너는 이제 막 방송일을 시작했다. 너는 연기자가 될 수도 가수가 될 수도 그렇다고 개그맨이 될 수도 없다. 가장 애매하고 가장 성공하기 힘든 '방송인'으로서의 길을 너는 한 발 한 발 내딛는다, '전 프로게이머'라고 스스로를 소개하면서.

  '전 프로게이머' 방송인인 너는 방송 카메라가 있는데도 종일 게임만 한다. 너의 방송 분량 대부분은 게임이다. 그것도 발매된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아주 오래된 게임. 방송에는 네가 집에서 게임하는 모습이 나가고 네가 게임 대회를 주최해 거기서 우승하는 모습이 나간다. 이스포츠 향유층이 아닌 이들은 게임 폐인이 티비에 나온다며 말세라고 악플을 달고, 인터넷에 관심없는 기성세대는 티비속의 너를 보곤 애들이 뭘 보고 배우겠냐며 혀를 찬다. 프로게이머로서 십년 넘게 네가 치열하게 훈련했던 시간들, 그 시간의 잔재로 네게 남은 버릇들이 그들에게는 '그깟 게임'이다. 여기는 그런 나라다.

  이 나라에서 네가 방송인으로 성공하는 데 '전 프로게이머'라는 수식은 네게 득일까, 실일까. 득일수도 있다. 스타판에 조금이라도 애정이 있었던 이들이라면 대부분은 네게 호감을 가지고 있을테니. 또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절대적인 너의 우호세력이 되어주기도 한다. 꽤 많은 너의 '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 도움이 될것이다. 하지만 시청자는, 인터넷에서 너를 비호하는 이들보다 스타판의 너를 몰랐던 이들이 훨씬 더 많다. 그들을 상대로는 '전 프로게이머'라는 타이틀이 독이 될 수도 있다. 여전히 '프로게이머'라는 직업은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는 이들이 많고, '게임'은 '악'으로 취급하는 이들이 많다. 온라인의 힘이 많이 세 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세상은 오프라인의 힘이 움직이고, 그들 중 다수는 짐작컨대 게임에 관대한 이들이 아니다.

 

  '전 프로게이머'라는 타이틀이 방송인 홍진호에게 득이 될 지도 장담할 수 없는데, 하물며 '여전히 게임하는 전 프로게이머'라는 수식이 네 방송일에 도움이 될 지 묻는다면 나는 단호히 부정할 수 있다. 나이 서른이 훌쩍 넘어서도 여전히 게임하는 남자, 그것도 현재 제대로 된 직업도 없이. 왠지 백수같고, 철 없어 보이며, 마이너 같다. 정말 단호히 말하자면 한마디로 B급 이미지다. 이런 이미지는 결코 네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너는 게임을 한다. 동생의 부탁에 흔쾌히 아프리카 방송에서 팀플을 한다. 공중파 방송인 <나혼자 산다>에 나와서도 종일 게임을 하고, 네가 직접 주최한 게임 대회 <스타 파이널 포>에서도 게임을 한다. 그리고 인터넷 방송국 게임 대회인 <곰티비 클래식>에서도 헤드셋을 끼고, 키보드를 치고, 마우스를 잡는다. 점점 더 화려한 조명을 받고 점점 더 좋은 카메라 앞에 서면서 '방송물'이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법한 네가, 상대적으로 열악한 무대에서 상대적으로 초라한 조명 아래 상대적으로 좋지 않은 카메라 앞에서 게임을 한다.

  이제 많이 굳어버린 손, 퇴화된 동체시력, 늦어진 반응속도, 부정확한 상황판단, 떨어진 방송경기 감각... 세월의 앞에서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을 감수하고 컨트롤도 멀티태스킹도 제대로 되지 않는 상태에서 게임을 한다. 공방 양민들 상대로도 차마 말하기 싫은 승률을 올리면서도 매일 아침마다 습관처럼 게임을 하고 옛 동료나 동생들과 추억을 곱씹으며 '썩은 손'으로 게임을 한다. 명절에 본가에 내려가서도 팬들과 후배들을 위해 피씨방까지 찾아가 게임을 하고, 한참 어리고 뛰어난 실력의 후배들과도 승산없는 게임을 한다.

 

  너는 여전히 게임이 너의 반쪽이라 말하고 여전히 게임계를 떠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 너에게 고맙다. 네가 스타판에서 당했던 그 모든 것들을 가슴 한켠에 묻어두고, 여전히 게임에 관해서라면 게이머를 처음 시작하던 그 시기의 그 마음을 가지고 있어주어 고맙다. 게이머 홍진호였던 너의 과거, 게이머 홍진호를 사랑했던 사람들, 그리고 여전히 게이머 홍진호를 사랑하는 이들을 놓지 않아주어 고맙다.

 

 구성훈과의 경기에서 무난히 발릴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너는 선전했고 꽤나 접전을 보여줬다. 게이머에게 꾸준한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더군다나 방송경기의 감각이라는게 얼마나 잃기 쉬운 것인지를 생각해 보자면, 너는 여전히 레전드 게이머라고 불릴 자격이 충분한 모습이었다. 그저 대충 얼굴마담이나 하려고 나온 게 아니었다는 걸 보여줘서 고마웠다.

 여전히 네 게임은 재밌고, 게임하는 너는 여전히 멋지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게임하는 너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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