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의 '팬질'을 본격적으로 한 것은 1997년 젝스키스의 팬이 된 이후부터였다. 이전에는 어떤 대상의 팬이 된다는 것이란 개념 자체가 없었으므로 통용되는 '팬질'을 했다고 보긴 어렵다. 물론 그 이전에도 나는 만화영화를 즐겨 보았으며 성우들의 연기를 찬양했으며 드라마에 정신이 팔려 있었고 한번 게임을 잡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기는 했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을 '팬질', 더 극단적으로 말해서는 '덕후질'로 볼 수 있느냐에 관해서는 부정적이다. 1997년 이전의 내가 즐겨온 것들은 모두 그저 '취미'에 불과했다.

 젝스키스의 등장 이후 나는 급속도로 '팬질'에 빠져들었다. 가장 먼저 젝스키스의 팬이 되었고 곧 이어 신화의 팬이 되었고 스타크래프트를 시작했으며 얼마 안 가 홍진호의 팬이 되었다. 더불어 그 즈음부터 만화영화나 성우나 드라마에 조금 더 '전투적'으로 달려들었다.


 팬질은 나의 많은 것을 바꿨고 또 많은 부분에 기여했다. 오로지 팬질을 하기 위해서 제로보드와 포토샵과 베가스를 배웠으며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컴퓨터 상식과 실력은 모두 그 시기의 산물이다. 초창기에는 팬사이트 제작과 관리, 당시 용어로 축전이라 불렸던 포토샵질, 어줍잖은 편집으로 내놓은 동영상 등을 나는 팬질의 결과물로 공유했으나 얼마 안 가 그것이 매우 비효율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열심히 만든 축전이나 영상보다, 내가 힘들게 관리하는 팬사이트보다 나의 글은 더 큰 호응을 얻었다. 상대적으로 훨씬 더 짧은 시간에 훨씬 더 쉽게 만들어 낼 수 있는, 그 별 볼일 없는 글이.

 초반에는 사람들의 호응에 더 신이 나서 글을 쓰게 된 것도 사실이나, 금새 나는 글을 쓰는 것이 내게 가장 잘 어울리고 또 즐거운 팬질의 방법이란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후로 나는 나의 '팬질'의 생산성을 모두 글에 집중했다. 가끔 물리기도 해서 눈을 돌려 다른 짓을 해봤지만, 얼마 안 가 그것이 가성비 좋지 않은 행위임을 깨닫는 데 그쳤다. 결국 나의 팬질은, 같잖긴 해도 글로 증명하는 것이 가장 값어치 있고 신났다.

 그래서 나는 글을 썼다. 팬픽도 썼고, 평론도 썼고, 헌사도 썼다. 뭐 지금은 대부분 숨겨둔 채 나 혼자 읽고선 피식대긴 하지만(사실 지금 공개된 글 중에서도 비공개로 돌리고 싶은 글이 있다. 고민중.) 어쨌든, 쓰기는 오질나게 많이 썼다. 그것이 내게 행복을 안겨다주는 대상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보답이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남는 것 없는 팬질에서 무언가라도 남기고픈 나의 자기만족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나는 자기만족 하지 않는 글을 남들에게 보이길 꺼려했으며, 인터넷에 올리는 순간 필연적으로 타인에게 공개될 수 밖에 없었으므로 글을 쓰는데 매우 공을 들였다. 초고를 바로 인터넷에 보인 적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은 아주 사소한 글이라도 최소한 두세번은 검토를 하고 공개했는데, 그렇게 했음에도 공개 후 다시 몇 번 씩이나 읽으며 야금야금 고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심지어는 몇 달, 몇 년 전의 글도 다시 읽었을 때 고치고 싶은 부분이 있다면 고치고야 말았다. 고쳐야 할 곳이 너무 많다면 차라리 비공개로 돌려버리기도 했다.

 다 쓰고 난 글도 이럴진대, 글을 쓰면서 내가 얼마나 나의 부족한 능력을 총 동원하여 힘을 기울이는지는 말해 무엇하랴. 그렇다보니, 처음에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대상을 위해 나의 팬질의 유희로서 시작한 글쓰기가 숙제처럼 느껴지거나 부담스러운 일처럼 느껴지거나 때로는 짜증나는 것으로 느껴질 때도 있었다.


 나처럼 재능이 없는 사람에게 글이란, 쓰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때야 비로소, 혹은 글을 쓰는 것이 미치도록 즐거울 때에야 비로소 잘 써지는 밀물 같은 것이다. 물이 들어올 때 잽싸게 노를 저어야 하는 것이지, 물도 들어오지 않는데 노를 아무리 죽어라 저어봤자 앞으로 나갈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래서 나는 대부분의 경우 내킬 때에만 글을 쓴다. 내키지 않을 때 글을 쓰려면, 내가 정말 기꺼워서 글을 쓸 때 보다 몇십 몇백배의 노력을 기울이고도 그 결과물은 형편없을 확률이 백퍼센트에 수렴한다. 그래서 나는 쓰고 싶은 글이 있어도 그 글이 써질때까지 기다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면 개인 사정도 있어서 그 기회를 놓치기도 하고, 극복 못 할 귀차니즘을 맞아 기회를 날리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블로그고 팬질이고 나발이고 그냥 다 버려두고 몇개월간 혼자 현자타임이나 갖는거지 뭐.


 어쨌든,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해 쓰지 못하는 글들이 있다. 어떤 것은 쓰다가 중단해버려서(그것이 자의에서든 타의에서든) 다시 쓸 기회를 찾는 글이고, 어떤 것은 내가 꼭 쓰고 싶은 글이고, 어떤 것은 내가 써야만 할 것 같은 글이다. 언제 밀물이 들이닥쳐줄지 기회만 보고 있다.


 때가 언제 올 지 모르지만 꼭 올 것이라고 믿으며 훗날을 기약하는 목록을 작성한다. 이것은 이 글들을 언젠간 꼭 쓰겠다는 스스로의 다짐 같은 것이기도 하고, 내 한심한 기억력을 위한 배려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목록을 나의 노트 카테고리에 넣어 다른 글들 사이에 묻어두지 않고 공지 목록으로 따로 빼 두는 것은, 혹시나 이 블로그에 들어와 나의 하잘것 없는 글을 재밌게 읽고 다른 글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에게 내보이는 약속의 징표 같은 것이 될 수도 있겠다. 뭐 그런 사람이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 신화

 - 신화, 2인자라 폄훼당하는 '1인자'에 대하여.

 - [신화 바로알기 시리즈] 전설을 넘어, 계속되는 '신화'가 되어라.

 - [신화 바로알기 시리즈] 아이돌과 뮤지션의 사이에서.

 - [신화 바로알기 시리즈] 누구도 경험해 보지 못한 '최장수 아이돌'의 무게.

 - 신화가 증명한 '광대'의 가치.


* 홍진호

 - '홍진호'에 관한 오해들.

 - 십년만에 말하는, '삼연벙'에 관한 오해들.

 - 홍진호는 박성준보다 아래인가? =>15.08.08, http://yusongi.tistory.com/615

 - 홍진호를 제대로 평가하기 위하여.

 - 홍진호의 유산

 - 훗날 가장 존경받는 선수가 되고자 했던 소년이 있었다.

 - [홍진호 명경기 시리즈] 폭풍의 시작, 2001년.

 - [홍진호 명경기 시리즈] 폭풍의 시대, 2002년.

 - [홍진호 명경시 시리즈] 군주로서의 폭풍, 2003년.

 - [홍진호 명경시 시리즈] 잦아드는 폭풍과 밀려오는 새 시대, 2004년.

 - [홍진호 명경시 시리즈] 새 시대를 맞이하는 옛 군주로서의 폭풍, 2005년.

 - [홍진호 명경시 시리즈] 폭풍의 소용돌이 그 끝자락, 2006년.

 - [홍진호 명경시 시리즈] 폭풍이 지나간 자리, 2007-2008년.

 - [홍진호 명경시 시리즈] 폭풍은 소멸하지 않는다, 2008-2011년.

 - 홍진호 팬이 본 [더 지니어스 2 -룰 브레이커-] 05화.

 - 홍진호 팬이 본 [더 지니어스 2 -룰 브레이커-] 06화.

 - 홍진호 팬이 본 [더 지니어스 2 -룰 브레이커-] 07화.

 - 홍진호 팬이 본 [더 지니어스 2 -룰 브레이커-] 못다한 이야기.

 - 홍진호 팬이 본 [더 지니어스 3 -블랙가넷-] 주인공의 귀환.


* 젝스키스

 - 젝키야 사랑해, 너흰 언제나 최고였어.

 - 내가 여전히 장수원과 김재덕을 사랑하는 이유.


* 기타

 - 내가 팬질하는 이들의 공통점.

 - 2인자, 그 사랑스러운 존재에 관하여.

 - [검은방 시리즈] 게임이 아닌, 비주얼 노벨로서의 검은방.

    : 이것은 동영상도 제작 중이라 글을 마치기까지 엄청나게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 내가 이 글을 완성할 때 쯤이면 아무도 검은방에 관심이 없겠지... 뭐, 괜찮다. 난 어차피 '더는 존재하지 않는 것'에 관하여 혼자 팬질하기를 충분히 즐길 수 있는 부류다.






+ 작성을 시작했다가 중단한 글은 밑줄로 표시한다.

+ 작성을 완료한 글은 가운뎃줄로 표시하고 해당 글을 링크한다.

+ 이 목록은 언제든지 추가·수정·삭제될 수 있다.

+ 마지막 작성 : 2015. 08. 15. AM11.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