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지적 홍빠홍진호팬의 시점에서 -

- '홍빠'가 아닌, '홍진호 팬'이 '홍진호'에게 바치는 헌사.-

 

 

 

* 이 글은 감상글이 아님을 밝힙니다. (감상글은 차후 업로드 예정)

* 의식의 흐름대로 쓴, 아주 긴 글.

 

 

 

 

 

 

 

 

  늘 그랬듯이 너의 GG 선언에 나는 눈물이 났다.

  GG를 선언하는 너는, 늘 그랬듯이 아쉬움을 애써 감추며 의연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너를 응원하던 내 가슴은 무너져 내렸지만, 제 3자는 '아름다운 패자'라며 다독였던 10여년 전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너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패배하는 모습 마저도.

 

 

 

  고백하건대 너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모습은 네 폭풍같았던 경기나, 네가 우승했던 대회나, 팬들을 아끼는 네 모습이나, 상대방 선수에게 보여준 매너가 아니라... 기뻐하는 우승자 옆에서 그들을 축하해주던 모습이었다. 늘 준우승으로, 조연으로 한쪽 옆에 서 있던 네 모습이 가장 사무치게 내 기억속에 남아있었던 것은, 너의 팬으로서 뼈져리게 아팠던 그 순간의 한 때문이었으리라.

 

  그래, 또다시 고백컨대 한때는 너를 원망한 적도 있었다. 패배를 하고도, 준우승을 하고도 사람좋게 상대를 축하해주는 네게 화가 났던 적도 있었다. 조연으로 밀려나서도 웃고 있는 네가 미웠던 적도 있었다. 언제나 "이번에는 우승하겠지?" 하며 너를 응원했던 나의 믿음과 기대감을 박살내버린 네게 지쳤던 적도 있었다. 늘 한 발짝이 모자라 정상에 닿지 못하는 네가 너의 팬들에게 희망고문을 한다고 느꼈던 적이 있었으며, 그래서 너를 응원하는 일을 포기하고 싶었던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언제나 너의 팬이었다. 너만의 팬이었다.

  네가 이루지 못한 저그의 한을 풀었다며 박성준을 추켜세우던 시절에도, 저그의 새 패러다임을 제시했다며 어떤 쓰레기 새끼가 본좌로 추앙받던 시절에도, 완성형 저그라고 불리우던 이제동이 날아다니던 시절에도 나는 여전히 너만을 응원했으며 너의 팬이었다.

  스갤에서 너를 가루가 되도록 까대도, 그나마 좀 점잖다던 여타 커뮤니티에서 너를 조롱해도, 이스포츠 커뮤니티를 넘어 일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까지 너를 우스갯거리로 삼아도 나는 너를 옹호했고 때로는 그들과 싸우면서 키배를 뜨기도 했으며 가끔은 속상해서 눈물흘렸던 너의 팬이었다.

  네가 숨만 쉬어도 너에게 돌을 던지던 이들이 넘쳐났던 때에도, 네가 돌팔매질을 당해 피투성이인 상태에서도 꿋꿋이 네 길을 걸었을 때에도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지만 여전히 너의 팬이었다. 너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늘 같은 자리에서 너를 응원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게 없었지만 나는 너의 팬이었다.

  나는 '콩빠'가 아니라 '홍진호의 팬'이었다.

 

  쏟아지는 비난과 조롱과 멸시에 네가 지쳤을 그 무렵에는 나도 지쳐있었다.

  한번만, 정말 단 한번만 우승을 했더라면 이러한 사단은 없었을 게 아닌가 싶어 너를 원망하던 그 시절에 너는 나를 포함한 네 팬들에게 경기로 답했다. 소멸된 줄 알았던 폭풍의 귀환으로 답했다.

  06신한 1시즌에서의 네 폭풍은, 빛바랜 내 소망과 식어버린 내 열정에 대한 너의 위로였다. 너는 나보다 더 처참한 몰골로, 나보다 더 많은 상처를 안고 나보다 더 많은 피를 흘리면서도 나를 다독였다.

  누구보다도 힘들었을 너는, 때로는 너를 원망하고 너를 미워했으며 너를 비난하고 너를 조롱했던 팬들의 상처를 걱정했다. 네 잘못이 아닌 일로 팬들에게 미안해했고 네게 해준 것 없는 팬들에게도 고마워했다. 그리고 너는 너의 팬들에게 다짐했다. 앞으로도 좋은 경기를 보여주고 싶다고, 그렇게 노력할 거라고.

  나는 너의 그 기약없는 다짐을 믿었다. 그리고 너는 길고 긴 폭풍전야를 묵묵히 견딘 너의 팬들을 위해 이따금 폭풍의 귀환을 보여주었다. 곰티비 클래식에서 윤용태를 잡았을 때도, 공군 입대 이후 김택용이나 이제동은 물론이고 우정호, 신상문, 김재훈, 정윤종 등을 잡았을 때도 너는 폭풍 그 자체였다. 나이가 들어 손이 느려지고, 멀티태스킹이 제대로 되지 않고, 눈이 느려지고, 반응속도가 느려지고, 네 스타일을 모두가 알고 있어 불리했을 때에도 너는 여전히 폭풍이었다. 그 위세가 예전같지 않았다 한들 폭풍은 폭풍이었다. 폭풍은 소멸되었다가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서 잠시 방황하다가 귀환하는 것이라는걸 너는 너의 게임으로, 너의 존재 자체로 증명했다.

  너는 그 자체로 폭풍이었다.

 

  네 경기에 울고 웃으면서, 네 전성기에 함께 기뻐하고 네 부진에 함께 힘들어했던 아주 오랜 시간동안 너의 팬으로 지내오면서, 나는 언제부턴가 내가 왜 너를 좋아하는지 잊고 지냈다. 너에 대한 애정뿐이었던 시기를 지나 어느샌가 애증의 대상이 되어버린 너를 놓지 못하면서도, 나는 왜 내가 너의 팬이 되었는지를, 왜 여전히 너의 팬인지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만큼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무조건적인 대상이었다.

  하지만 06신한 1시즌에서 귀환한 폭풍을 보고 나는 잊고 지냈던 그 이유를 떠올렸다.

  너를 처음 보았던 2001년 한빛배에서 유병준과의 경기를 기억했다. 아직도 이가 갈리는 홀 오브 발할라, 그 테란맵에 불었던 네 폭풍을.

  01코카배 결승전 1경기, 홀 오브 발할라를 깔고서도 끈질기게 몰아쳤던 너의 폭풍을 기억했다. 그 끈질긴 혈투의 끝에서 GG를 선언한 너의 그 아쉬운 얼굴을.

  02왕중왕전 결승전에서 조정현을 꺾었던 너의 당당한 우승을 기억했다. 02KPGA 위너스 챔피언십에서 임요환을 꺾고 우승했던 감격의 순간을 기억했다.

  03올림푸스배 결승 3경기, 기요틴에서의 그 처절한 승리와 '엄마 사랑해요'라는 서지훈의 우승 소감을 듣고도 웃으며 동생을 축하해주던 너를 기억했다. 조명이 꺼진 무대에서, 대기실에서, 화장실에서 남몰래 울었던 너를.

  03삼보배 결승 직전까지 누구도 범접할 수 없었던 거센 폭풍을 기억했다. 결승 3경기, 유보트에서의 그 처절한 패배를.

  04스카이 4강에서의 패배와 05아이옵스 임진록을 기억했다. 05스니커즈배 우승을 기억했고 05블리즈컨 우승을 기억했다.

  너는 남들이 뭐라고 하든간에 꾸준히 너의 폭풍을 지켜오고 있었다. 남들이 인정하든 말든 너는 내게 '수많은 우승 경력을 가진' 최고의 저그였다.

  너의 팬이 된 이유를 굳이 말해보라고 한다면 나는 수많은 이유를 댈 수 있다. 화끈한 너의 경기 스타일, 이기건 지건 늘 재미있었던 너의 경기 그 자체, 승부에 대한 너의 집념, 굴욕을 두려워 하지 않는 투지, 네 경기와 네 스타일에 대한 자부심과 프로정신, 상대 선수에 대한 매너, 팬들에 대한 사랑, 늘 곧았던 너의 신념과 목표...... 아마 너의 모든것을 하나하나 설명해야 할지도 모른다. 너는 그 자체로 사랑받기 충분했고 너는 그것을 계속해서 증명해냈다.

  06신한 시즌1 이후에도 너는 08곰클래식 윤용태전이나, 09프로리그 김택용전이나, 09프로리그 임진록이나, 10프로리그 이제동전에서도 계속해서 나를 흔들어 깨웠다. 왜 내가 너의 팬이 되었고 아직도 너의 팬인지, 왜 내가 계속해서 너를 응원해야 하는지 너는 계속해서 그것을 증명해보였다. 너는 은퇴경기까지도 네가 왜 폭풍이고 왜 나를 포함한 팬들이 너의 폭풍을 사랑해 마지않았는지를 보여주었다, 비록 그것이 패배일지라도.

 

  너는 응원할 수 밖에 없는 게이머였고 사람을 매료시키는 게이머였다. 너는 사랑받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네게 매료되어 너를 응원했으며 너를 사랑했다.

  내가 사랑했던 네가 은퇴하던 순간을 기억한다. 너는 누구보다 성대한 은퇴식을 치뤘고 누구보다도 많은 이들의 아쉬움 속에 떠났다. 너를 잉태했던 곳에서 너는 근사하게 자랐으며 네가 잉태했던 곳을 너는 근사하게 키워냈다. 누가 뭐래도 너는 이스포츠의 기둥이었으며 이스포츠는 너의 기둥이었다. 네가 떠남으로써 이스포츠는 가장 튼튼했던 버팀목 하나를 잃었고 너는 너의 청춘을 지탱했던 가장 큰 버팀목 하나를 빼낸 셈이었다.

  그리고 이스포츠에 대한 나의 애정은 그렇게 무너졌다. 내가 사랑했던 '프로게이머 홍진호'는 바로 거기에 묻혔다. 나는 내가 사랑하던 너를 너의 은퇴식과 은퇴경기를 끝낸 그 순간에 묻었고 되도록이면 그 지점을 찾지 않으려 애썼다.

 

  너는 내게 화상의 흉터였다. 지독히 뜨거웠던 만큼 깊게 자리한 흉터. 너는 나를 즐겁게 해주었던 고마운 사람이자 내가 뜨겁게 사랑했던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슬프고 가슴아픈 기억이자 치유되지 않는 한이었다.

  나는 너의 마침표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차라리 너의 흔적을 지우고 너를 깊이 묻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너는 으레 그랬듯이 내가 너를 포기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비록 레전드 매치라는 이벤트성 경기였지만, 너는 라스트 브루드워 결승전에서 최후의 저그로서 다시금 폭풍의 건재함을 내게 확인시켰다. 임진록의 마지막을 승리로 장식하는 너를 보면서, 은퇴를 하고 다른 게임의 감독을 하고 있으면서도 네 존재를 잊지 않고 그것을 지켜왔던 너를 보면서 나는 감격 때문인지, 안도 때문인지, 아쉬움 때문인지 모를 눈물을 흘렸다.

  그때부터였던것 같다. '프로게이머가 아닌 홍진호'를 인정할 수 없었던 내가, 네가 어떤 방식으로든 계속해서 이스포츠판에 남아주기만을 바랬던 것은. 혹시나 하는 일말의 기대와 희망 때문이었음을 부정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선수'가 아니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홍진호를 낳았던 곳에, 홍진호가 낳았던 곳에 네가 있어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롤의 L도 모르지만 너의 팀인 제닉스 스톰을 응원했고 예전보다 열성적이지는 않지만 너의 소식을 찾아 들었다.

 

 

 

  네가 TV에 나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건 작년 여름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그 무렵의 나는 일과 개인사에 치여 정신이 없었고, 나는 한때 내가 사랑해 마지않았던 너의 소식을 귓등으로 흘려 들었다. 그리고 어느정도 여유를 되찾은 초가을 무렵, 문득 흘려 들었던 너의 소식이 떠올라 '더 지니어스 -게임의 법칙-'을 다운받았다.

  사실 다운로드가 끝난 뒤에도 며칠을 망설였다. 당시의 나는 네가 우승했다는 사실을 몰랐으며 네가 얼마나 활약했는지도 몰랐으므로. 네가 괜히 예능에 나와 듣보잡 취급을 받거나, 굴욕을 당하거나, 무시를 당한다던가 하는 식으로 상처를 받았을까봐 겁났고 그런 너를 보면서 내가 다시 상처받을까 겁났다.

  스포당하지 않고 볼 수 있었던 것이 천운이라고 생각할 만큼 극적이었던, 한편의 드라마였다. 네가 프로게이머로 살아온 그 시간도 물론 한 편의 드라마였지만, 지니어스는 훨씬 더 유쾌하고 즐거운 해피엔드 드라마였다.

  소년만화의 주인공 같았던, 아니 그보다 더 빛났던 '지니어스 게임'속의 너를 보면서, 끝내 우승을 거머쥔 너를 보면서 나는 정말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나 가슴아팠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네가 이뤘던 수많은 우승을 너 스스로 없는 경력 취급해야 하는, 기분나쁜 역사의 농간 때문이었고, 둘째는 비록 우승했지만 그것이 프로게이머로서 스타리그에서 이룬 것이 아니라는 회한 때문이었고, 셋째는 네가 그동안 정말 하고 싶었던 그 우승소감을 예능에서 말했기 때문이었으며, 마지막으로 이 기회를 마지막으로 승부사 홍진호, 게이머 홍진호를 볼 수 없을거라는 아쉬움 때문이었다.

 

  나는 너의 멋진 플레이를 실시간으로 보지 못했다는 것에 아쉬움을 느끼며 지니어스 1기를 수없이 돌려보았다. 네 은퇴 이후 잊고 있었던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네 옛 경기들을 다시 꺼내보면서 향수에 젖었다. 그리고 11월, 네가 다시 지니어스에 출전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것도 임요환과 함께.

  당시의 내 기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마치 네가 다시 선수로 복귀했다는 소식을 들은 기분이었다. 스타크래프트는 아니지만, 다시 게이머 홍진호를 볼 수 있다! 그것도 최고의 라이벌과 함께 겨루는 홍진호를 볼 수 있다! 지니어스2에서의 임진록 소식은 스타리그 결승에서 다시 임진록이 성사된 것과 같은 기대를 내게 안겼다.

  11월, 네가 지니어스2에 다시 출전한다는 소식을 들은 그 순간부터 지니어스2기 1화를 볼 때 까지, 그리고 그 다음화, 다다음화, 7화를 볼 때 까지 나는 매일 손꼽아 방송 시간을 기다렸다. 마치 네가 출전한 스타리그, 프로리그 경기를 기다리던 그 시절의 나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남들이야 어떻게 생각했는지 몰라도 '더 지니어스'속의 너는 내게 '프로게이머 홍진호'였으며 '홍진호 선수'였다. 너는 선수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정당하게, 최선을 다해서 멋진 플레이를 보여주었으며 그래서 나는 선수시절의 너를 응원하듯 너를 응원했다. 네가 승리하기를 바랬고 네가 다시 우승하기를 바랬다.

 

  우승. 네가 목말라했었던 그것이자, 내가 염원했었던 그것.

 

 

 

  십년이 넘도록 지켜본 너는 최고의 프로게이머였다. 우승할 자격이 있는 게이머였고 우승할 수 있는 실력도 가지고 있었다.

 

   이벤트전으로 치부하기에는 상금 규모나 참가 선수들 면면이 스타리그 못지 않았던 스니커즈 올스타전은 그렇다 치더라도, 네이트배 시드까지 주었던 왕중왕전이나, 방송사가 망했다고 위상을 격하시킨 겜티비 우승이나, 양대리그 정립 전의 기록이라 폄하된 위너스 챔피언십 우승처럼 스타판의 역사를 기록하는 이들의 손에 훼손된 너의 우승기록은 생각할수록 억울하고 피가 거꾸로 솟지만 애써 논외로 하더라도, 너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최고의 저그였고 최고의 프로게이머였다.

 

  누군가는 구차한 변명이라 비웃겠지만, 홀 오브 발할라가 아니었다면, 라그나로크가 아니었다면, 유보트가 아니었다면, 패러독스가 아니었다면, 펠레노르가 아니었다면, 개척시대가 아니었다면... 그랬다면 네가 무관의 제왕이라며 놀림받을 일도 없었을 거라고 나는 장담한다. 사실 언급한 맵 뿐만이 아니라, 당시에 개념맵 소리를 듣던 대부분의 맵들이 밸런스 붕괴된 맵임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것이다. 6:4를 개념맵 취급했었고 7:3도 나쁘지 않은 맵이라고 했으니 말 다 했지. 사실, 그나마도 네가 맞춰놓은 밸런스였다.

  혹자는 승부조작 했던 쓰레기 새끼나 이제동도 테란맵에서 싸웠다고들 하지만, 네가 혈혈단신으로 싸웠던 그 테란맵들에 비하면 그 아이들이야 말로 개념맵에서 싸운 셈이었다. 앞마당 노가스맵이 당연하다고 여겨지던 시절에도 투해처리 레어로 테란을 짓밟던 너였으니, 맵이 조금만 더 공정했다면 너는 내가 아쉬워했던 그 모든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고도 남았을거라고... 나는 아직도 그렇게 생각한다.

 

  최고의 실력을 가지고 있던 시절, 너는 너의 실력과는 무관한 이유로 우승을 저지당했다. 대놓고 테란을 밀어주던 세력들은 이미 네가 가지고 있던 우승기록을 도둑질해간건 물론이고, 도저히 저그가 이길 수 없는 맵을 깔아대며 저그를 대표해 악착같이 싸우던 너를 가로막았다.

  흔히 너의 준우승을 얘기할 때, A급 테란이었던 서지훈을 포함해서 임요환과 이윤열 그리고 최연성이라는 최고의 테란들만 결승전에서 만났기에 네가 졌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당시에 내가 본 너는 절대 그들에게 뒤지는 실력이 아니었다.

  스타판의 성장을 위해서는 이야깃거리가 필요했다. 스타판이 몸집을 키우기 위해서는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여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게임을 잘 모르는 이들도 끌어들일 수 있는 게임 외적인 스토리가 필요했다. 누구나 쉽게 몰입할 수 있는 이야기의 구조는 아주 간단했다. 선과 악을 만드는 것이었고 절대강자와 난세영웅과 희생자를 만드는 것이었다. 저그는 악당이 되어야 했고 저그의 수장이었던 너는 희생자가 되어야 했다. 저그는 매번 우승을 노리지만 우승할 수 없는 악이었고, 그 악을 이끌던 너는 매번 선역인 테란에게 우승을 내어주는 아쉬운 2인자여야 했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써내려가던 이들에게 너는 절대 우승하면 안되는 존재였다.

  너는 이따위 말도 안되는 이유로 번번히 우승을 저지당하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네가 계속해서 준우승과 4강에 머무르던 그 시기, 나는 네가 혹여 그대로 꺾여버리진 않을까 늘 노심초사했다. 우승을 향한 너의 의지가 사그라드는 것은 아닐까, 네가 포기해 버리는 것은 아닐까 걱정할 때 마다 너는 의연하게 툭툭 털고 일어서며 말했다. 너를 사랑하고 응원하는 너의 팬들을 위해 다시 도전하겠노라고.

 

  그래, 네가 은퇴를 선언한 그 순간까지도 언젠가 반드시 너의 우승을 내 두 눈으로 볼 날이 있을거라고 믿고 싶었던 이유는, 종족과 맵의 불리함을 떠안고도 기어코 우승을 향했던 시절의 너를 지켜 보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너는 그 누구보다 우승할 자격이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너는 3:2로 졌던 다른 결승보다 차라리 덜 아쉽다고 했지만, 삼보배 결승은 내게 정말이지 큰 상처였다.

  삼보배에서의 너는 정말 무적이었고, 나는 네가 02KPGA 1차에서 해내지 못했던 전승 우승의 위업을 달성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훗날 들은 이야기로는 네가 "아무나 올라오라고 해, 내가 다 이겨줄테니까."라는 뉘앙스의 말을 했을 정도로 너 역시 네 실력에 자신있던 시절이었고 나는 드디어 네 우승을 목도할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네 유니폼 뒤에 위풍당당하게 그려졌던 風자를 기억한다. 1경기와 2경기의 무력한 패배를 기억하고 3경기에서 처절하게 몸부림치던 너를 기억한다. 땀으로 번들거리던 네 얼굴을 기억한다. 웃으며 최연성을 축하해주던 너를 기억한다. 그 날 이후 다시 보지 않았지만 나는 여전히 잊지 못할 그 결승전을 기억한다.

 

  삼보배에서 이루지 못했던 전승 우승의 한은 잊혀진 줄 알았다. 조 1위로 올라가지 않아도 좋고, 전승이 아니어도 좋고, 3:2 승리라도 좋으니 네가 우승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시간이 길어서일까. 너의 전승 우승은 내게 잊혀진 꿈이었다.

  그런데 지니어스2에서 네가 4화까지 연이은 우승을 하면서, 가슴속 어딘가에 파묻혀 있었는지도 모를 그 꿈이 되살아나 나를 설레게 했다. 한달동안이나 그 꿈에 취해 살 수 있어서 기뻤다. 삼보배 당시의 무적모드 너를 보는 그 기분을 다시 느낄 수 있어서 즐거웠다.

 

  여전히 너는 나로 하여금 너에 대한 기대를 가지게 했고, 여전히 너는 너를 믿게 만들었으며 여전히 너를 포기하지 못하게 했다.

  삼보배의 그 쓰라린 상처를 가지고도 "이깟 일로 포기하지 않을테니 좀 더 지켜봐 주세요."라며 너를 포기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처럼.

 

 

 

  너는 '선'과 '악'의 대결에서 늘 '선'이 이기는 것이 싫어서, 가장 악당으로 보이는 저그를 골라 '악'이 '선'을 이기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지만, 내가 지켜본 너는 늘 '선'이었다. 저그는 악당이 아니라 악당 취급을 받는 약자였고, 그 저그를 고른 죄로 너는 늘 희생을 강요당했다.

 

  임요환을 위시한 테란을 대놓고 밀어줬던 온게임넷은 김동수와 박정석의 우승을 시작으로 '가을의 전설'을 위해 특정 시즌에는 프로토스의 손을 들어줬다. 엠비씨게임이라고 딱히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의도된 시나리오에서 저그는 항상 희생양이었다.

  너를 제외한 다른 저그들이 무참하게 나가 떨어질때도 너는 끝끝내 홀로 남아 절벽 끝에서 버티며 온 몸으로 저그를 지켜냈다. 그리고 스타판은 그런 너를 제물로 삼아 이야깃거리를 만들고 너를 뜯어먹으며 몸집을 키웠다.

 

  그 불합리함과 부조리함을 탓하지 않고 너는 늘 그 자리를 지켰다. 테란의 최강자가 4명이나 바뀌는 순간에도 너는 저그의 마지막 보루로 늘 최정상에 있었고 그들과 싸웠다.

  설령 그들의 앞에 주저앉거나 무릎을 꿇을지언정 너는 네가 서 있던 절벽 가장 끝에서 도망치지 않았다. 너는 네 어깨에 짊어진 저그의 숙명을 끝내 내려놓지 않고 버텼다.

  네가 맞서 싸운 것은 단순히 최강의 테란 4명이 아니었다. 너는 동시대 모든 테란에 맞서 싸웠고 뒤에서 그 테란을 밀어주는 검은 손과 싸웠다. 저그의 우승과 너의 우승이 이음동의어로 사용되던 시절, 저그의 우승을 용인하지 않던 그 모든것들에 대항해 너는 홀로 싸웠다.

 

  흥행을 위해 희생을 강요하고 의도된 시나리오를 숙명이라 우기던 이들에게 맞서던 너는 '선'이었다.

  너는 희생을 강요받으면서도, 불운을 강요받으면서도 저그의 미래를 짊어진 채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묵묵히 걸었다. 네가 걷는 길은 누군가가 장애물을 놓고, 함정을 파둔 길이었지만 너는 피하지 않고 그 길을 꿋꿋이 걸었다.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고 함정에 빠져 다쳤지만, 너는 네 등에 짊어진 짐을 탓하거나 장애물을 놓고 함정을 파둔 이를 탓하지 않고 그저 앞만 보고 걷던 '선'이었다.

 

  내게 테란은 '선'이 아니라, 검은 힘을 등에 업은채 무자비하게 다른 종족을 탄압하던 '악'이었다. 가문의 힘을 믿고 왕좌에 앉아 독재를 꿈꾸던 폭군이었다. 내게 '선'은 저그였다. 무시받고 천대받고 괄시당해도, 힘겹게 버티며 자신을 지켜내던 '선'이었다. 아무리 탄압을 당해도 끝끝내 폭군에 맞서던 정의였다.

  그런 저그의 선봉장이었던 너야말로 '선'이었고 '정의'였다. 저그의 무덤이자 프로토스의 묘지였던 라그나로크에서 테란이 아닌 종족으로 유일하게 승리했던 네가 '선'이었다. 대놓고 가을의 전설을 노리며 깔았던 패러독스, 저그의 또 다른 무덤이었던 그 곳에서 박경락까지 테란을 선택했을 때에도 "저그로 합니다."라고 단언했던, 다른 저그들이 해보지 못한 승리를 자신이 꼭 해보고 싶다며 어떻게든 해법을 찾아보겠다던 네가 바로 '선'이었다.

 

  나는 너를 보면서 '선'이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 '선'을 방해하고 괴롭히던 모든 것들을 '선'인 네가 물리치고 우승을 거머쥐며 정상에서 웃을 수 있을거라는 기대를 가졌다. 늘 아슬아슬하고 위험해 보였지만, 나의 '선'이었던 너는 약하지 않았고 악하지 않았다. 그래서 너를 응원했다. 내게 '영웅'은 박정석이 아니라 홍진호, 너였다.

 

 

 

  십여년이 지나도 너는 '선'이었다. 세월의 때도 묻지 않은채 너는 '선'이었다. 수없이 패배를 맛보고 숱한 좌절을 겪고 난 뒤에도 너는 '선'이었다. 너를 악의 구렁텅이로 끌어당겼던 이들의 손을 모두 뿌리치고 너는 '선'이었다. 또다시 너를 배척하고, 무시하고, 희생양으로 만들고자 하는 이들 사이에서도 너는 여전히 '선'이었다. 여전히.

 

  그렇게 죽어라 저그를 탄압해도 끝까지 버티던 네게 더더욱 악랄하게 굴었던 이들처럼, 지니어스 게임 속 '악'들은 네가 '강자'라는 핑계로 너를 배척했다. 그 악랄한 이들의 탄압에도 너는 네 자신을 더럽히지 않고 버텼다.

  마치 십여년 전 그 때 처럼, 너는 또다시 절벽 끝에서 너만의 방식으로 싸웠다. '저그'라는 종족을 짊어졌던 그 때 처럼, 이번에 너는 '선'을 짊어지고 싸웠다. 그것은 '힘'이 아니라 '짐'에 가까웠으나, 너는 끝끝내 그것을 놓지 않았다. 십여년 전에도 그랬듯이.

 

  그래, 너는 여전히 너다웠다.

  너를 제물로 삼으려는 이들을 두려워 하지 않고 다시 맞섰으되, 너는 승리를 위해 결코 네 신념을 팔지 않았다. 너는 여전히 네가 지키고 싶어하던 너만의 정의를 지켜가며 싸웠다. 존경받는 게이머가 되고 싶다던 너는, 너의 그 목표를 조롱하던 이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아직도 너만의 목표를 위해 너만의 방식을 고수하고 있었다.

  정당한 승부, 자랑스러운 승리, 동료이자 적인 이들에 대한 존경과 존중, 팬들을 위한 재미있는 플레이, 진지하게 게임에 임하는 자세, 모두에 대한 신의, 프로로서 가져야 할 승부욕, 네 게임에 대해 설명하기를 좋아하던 모습까지. 너는 여전히 내가 사랑했던 '프로게이머 홍진호'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래서 나는 또다시 나의 '선'이었던 너의 우승을 기도했고 이번에는 반드시 '선'이 이기기를 바랬다.

 

 

 

  스타판은 권선징악의 동화가 아니라 전쟁이었다. 착한 자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강한 자가 이겼다.

  '선'은 '독'을 이기지 못했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때로는 악해져야 했고 때로는 독해져야 했으나, 가엾은 나의 영웅은 그러지 못했다. 너는 어쩔 수 없는 '선'이었다. 이길듯 이길듯 하지만, 마지막에는 지고 마는.  너는 패배할 수 밖에 없는 '선'이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네가 조금만 더 독한 사람이었다면, 네가 조금만 더 이기적인 사람이었다면 너는 무개념맵 따위와는 상관없이 우승을 거머쥐었을거라는 생각에 나는 늘 아쉬웠다.

  아직도 너무 아쉽고 억울한 03올림푸스배 1경기. 네가 다 이긴 그 경기에서 뜬금없이 PPP를 쳤던 서지훈을 나는 네가 은퇴할 때 까지 미워했다. 솔직히 말해서,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밉다. 다 진 경기에서 하필 그 순간에 PPP라니...

  너는 그 상황에서 항의 한번 하지 않고 쿨하게 재경기를 받아들일 게 아니라, 억울해 하지도 않고 5경기 전략을 땡겨 쓸 게 아니라, 경기 속행을 거부하고 우세승을 주장했어야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너는 올림푸스배에서 우승했어야 했다.

  그러나 너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또다시 준우승에 머물렀다. 그리고 나는 그러한 너를 책망하면서도, 그런 너이기에 너를 더 사랑했다.

 

  03마이큐브 8강, 패러독스를 기억한다. 저그의 무덤이었던 그 곳을 기억한다. 너의 저그를 사랑해 마지않던 내가, 차라리 네가 테란이나 프로토스로 경기하기를 바랬던 그 지옥을 기억한다. 주종족이 아닌 테란이나 프로토스로도 동료들을 상대로 승률이 높았던 너였지만, 너 스스로 저그가 암울하다고 했던 그 곳에서 저그를 고집했던 너를 기억한다. 도무지 저그가 이길 수 없는 그 맵에서 어떻게든 이겨보려고 노력하던 너의 집요함을 기억한다.

  패색이 짙던 상황에서 디스가 걸렸던 순간, 환호하던 나를 기억한다. 그 찰나의 순간동안, 제발 연결이 끊기고 재경기 하게 되기를 두 손 모아 염원했던 나를 기억한다. 그리고 그런 내게 보란듯이 네가 화면에 찍은 두 글자를 기억한다. GG. 악착같이 버티던 너의 패배선언에 순간 화가 나 울컥하던 나를 기억한다. 곧이어 화면에 비춰진 네 얼굴을 기억한다. 숨을 몰아쉬던 너의 그 의연한 표정을 기억한다. 내 귓가를 때리던 해설진들의 칭찬을 기억한다.

  너의 GG 선언에 화를 냈던 내가 부끄러웠다. 홍랜덤, 홍토스는 어디다 갖다 버리고 저그를 골랐느냐고 너를 책망했던 내가 부끄러웠고 재경기를 외쳤던 내가 부끄러웠다. 그 날 너의 패배는 그 어떤 승리보다 아름다웠다. 경기가 끝나고 박정석에게 "꼭 우승해라."하며 동생을 격려했다던 너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새삼 깨달았다. "이래서 내가 너의 팬일 수 밖에 없구나." 하고.

  그래, 그 때에도 그 이전에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너는 그런 게이머였다. 너는 최후의 최후까지 포기하지 않고 싸울만큼 매 경기마다 최선을 다했고 항상 승부욕에 불탔지만, 게임 외적인 요소가 경기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경계하며 정당한 승부를 지향하던 게이머였다. 너는 그 누구보다 순수한 게이머였다. 너는 누구보다도 순수하게 게임을 사랑했고, 네가 지향하는 순수한 승부에 대해 누구보다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게이머였다.

 

  04스카이 4강, 악몽과도 같았던 임진록. 너 역시 평생 잊지 못하겠지만, 내게도 그 날은 잊을 수 없는 날이다. 그 충격의 패배를 마주한 네 얼굴을 어떻게 잊을까. 너는 잠시 망연자실해하는 표정이었고, 잠시 아쉬워하는 표정이었으며, 잠시 화가 난 표정이었다. 패배후 그런 표정을 짓던 너를 나는 처음 보았고, 나는 너의 패배가 아쉽다거나 임요환의 승리에 화가 난다거나 하기보다는 너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그리고 훗날 네가 밝혔듯이, 미친듯이 달려 도착한 곳에서 혼자 깡소주를 마시고, 피씨방에 들어가 사람들의 반응을 본 뒤 네가 적었다던 그 글. 그 글을 읽고 무너졌던 내 가슴을 어떻게 말로 다 할까. 한번도 네 자신 이외의 무언가를 탓해 본 적 없던 네가, 처음으로 테란이라는 종족의 유리함과 천운을 탓했던 그 글을 읽으면서, 나는 네가 비겁하다고 느끼기보다 너의 무너진 그 자존심과 자긍심을 걱정했다. 네가 가장 화가 났던 대상은 임요환이 아니라 너 자신이었다는 것을 알기에 더욱 그랬다. 매번 준우승에 머무르면서도 네가 좌절하지 않았던 이유, 프로게이머로서의 너의 자존심과 저그라는 종족의 수장이라는 자긍심, 그것이 산산히 조각났으니 혹여 네가 거기에서 주저앉을까 겁났다.

  그러나 너는 또다시 일어섰다. 누구보다 힘들었을 네가 그저 팬들의 한마디 위로를 바라며 적은 그 글에 대해 무수한 비난이 쏟아졌지만, 너는 그 십자포화를 맞고도 다시 일어섰다. 이전까지 너를 응원하던 많은 이들이 너의 절규마저 조롱했지만, 너는 아랑곳않고 다시 너의 길을 걸었다. 05아이옵스 임진록에서 또다시 벙커링을 시도한 임요환에게 설욕했던 너의 덤덤한 표정을 기억한다.

  훗날 너는 그 치욕의 순간을 소회하면서 말했다. 가장 아쉬웠던 것은, 지더라도 멋지고 재밌는 경기를 보여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는 점이라고. 내가 사랑했던 너는 그런 게이머였다. 최고보다 최선을 위해 노력하던 게이머였고 승리에 대한 욕심만큼이나 좋은 경기에 대한 욕심이 있던 게이머였다. 너는 지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기기 위해 싸웠고, 너를 위한 경기가 아니라 팬들을 위한 경기를 했다.

 

  돌이켜보면, 너의 이러한 점들이 너의 우승을 방해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너의 이러한 점들이 나로 하여금 너를 계속해서 응원하게 했고, 너를 사랑하게 했다.

 

 

 

  너는 여전히 너다웠다. 내가 응원했었던 그 시절 그대로였다. 내가 사랑했던 그 모습을 너는 여전히 간직한 채였다. 그리고 너는 그 시절 그랬던 것처럼, 아름다운 패자가 되었다. 너의 실력과 무관한 이유로 패한것까지도 그 시절과 같았다. 혈혈단신으로 절벽 끝에서 다수와 맞서 싸우다가 끝내는 무릎을 꿇었지만, 끝까지 네가 짊어진 것들을 내려놓거나 포기하거나 도망치지 않았다는 것 까지도 너다웠다. 2연속 우승을 응원하며 가슴졸이던 나는 또다시 나의 '선'이 패배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그 시절 그랬던 것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마지막까지 '승리'가 아니라 '게임 다운 게임'을 생각했던 너라서 기뻤다. 상대의 올인에 폴드하지 않고 네가 지지 않을 상황을 믿고 콜을 했던 너라서, 승부를 피하지 않던 너라서 기뻤다. 패배에 아쉬워 하는 게 아니라, 좋은 게임을 보여주지 못한 것을 아쉬워 하는 너라서 기뻤다. '게임'이 아니라 '도박'을 했음에도, 결과를 의연하게 받아들이고 상대에게 멋지게 GG를 선언하는 너라서 기뻤다. 여전히 '프로게이머'다운 너라서 기뻤다.

 

  네가 끝까지 '선'이어서 기뻤다.

 

 

 

  사실 너는 얼마든지 악해질 수 있었다.

 

  내가 지켜본 한, 그리고 내가 기억하는 한 너는 가장 많은 모욕을 받은 게이머였다. 너는 너의 팬이었던 나조차도 견디지 못할 만큼 수많은 비난을 받았고 조롱을 받았으며 끝없는 멸시와 치욕을 견뎌내야 했다. 그것은 한 사람이 감내하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폭력이었다.

 

  너는 단지 성적이 나쁘다는 이유로, 팬들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네 의지와는 상관없이 차디찬 땅에 산채로 파묻혔다. 너를 힐난하던 이들은 너의 절규를 듣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파묻은 네가 숨막혀 몸부림치는 광경을 보며 낄낄거렸고 네가 발버둥칠때마다 너를 짓밟았다. 그들은 심심하면 너를 파묻은 곳에 흙을 끼얹어 다지거나, 그곳에 침을 뱉거나, 그곳에서 음주가무를 하고 놀았으며 때로는 간신히 숨이 붙어있는 너를 꺼내어 난도질했다.

  그들 중에는 한때 너의 팬이었던 자들도 있었다.

 

  나는 억울했다. 너는 절대 그런 취급을 받을 게이머가 아니었다. 너는 충분히 좋은 기록을 가지고 있는 게이머였으며, 04스카이 4강과 05WCG 예선을 제외하면 네가 목표로 하던 '존경받는 게이머'에 위배되는 일을 하지 않았고 그나마 앞선 두 사건도 큰 오점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웠다.

 

  그러나 너는 까였다. 가루가 되게 까였다. 네가 했던 실수가 오점이든 아니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너를 까대던 이들은, 종국엔 네가 숨만 쉬어도 너를 깠다. 그들은 너의 모든것을 문제삼았고, 너는 네가 걸어온 길과 네가 지켜왔던 신념과 네 소중한 목표를 부정당했다.

  너를 까대던 이들은 점점 그 세력을 불렸고, 너는 너의 팬을 제외한 모두에게 죄인이 되었으며 너를 옹호하는 이들은 모두 마녀사냥을 당했다.

 

  너를 향한 폭력은 문희준을 향한 광기에 비견될만큼 잔인했다. 내가 기억하기에, 너는 문희준 이후 문희준 다음으로 많이, 그리고 오래 까인 사람이었다.

  나는 너에게 가해지는 집단의 광기와 폭력앞에서 무기력했다. 그들이 부정하는 너의 본모습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면 어김없이 융단폭격을 맞았다. 나는 이따금씩 무모하게 그들과 키배를 뜨며 싸웠지만, 그저 속으로 화를 삭히거나 그들을 애써 무시하려고 했던 적이 더 많았다. 나는 너를 위해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는 팬이었다. 그리고 네 대부분의 팬은 나와 같았다.

 

  너는 혼자였다. 너는 갑옷도 방패도 없이 혼자 그들과 맞섰다.

  아니, 버텼다고 표현하는게 옳을지도 모르겠다. 너는 너에게 날아오는 오물을 그대로 뒤집어썼고 너를 향한 욕설을 들었으며 너에게 가해지는 돌팔매질을 버텼다. 눈부시게 빛나던 너는 거기에 없었다. 너는 온갖 오물로 더럽혀져 있었으며 온갖 상처로 피투성이였다. 그러나 너는 너덜너덜한 몸으로도 눈물나도록 꿋꿋하게 버텼다. 너는 눈을 감지도 귀를 막지도 않았고 주저앉지도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나는 네가 주저앉을까봐 노심초사 하는 것 말고는, 상처 투성이의 네가 그대로 죽어버릴까봐 두려워 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게 없었다. 네가 선수 생활을 포기할까봐 겁났고 네가 혹여 나쁜 생각이라도 할까봐 진심으로 무서웠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너는 피떡이 된 몸을 이끌고 걸었다. 차라리 아무도 너를 찾지 못하는 곳으로 도망가 편히 쉬기를 바랬을만큼 엉망진창인 상태에서도, 너는 어떤 길을 걸어갔다. 그 길은 아무도 그 끝에 도달해 본 적 없는 길이었으며 안개가 자욱해 한 치 앞도 보기 어려운 길이었다. 너는 피범벅을 해서는 그 길을 힘겹게 힘겹게 걸었다.

 

  나는 그런 너를 보며 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게 없었다. 너는 힘겹게 발길을 옮기는 와중에도 너의 옆에서 걷고 있던 너의 팬들에게 웃어주었으며 때로는 나를 포함한 너의 팬들을 걱정하고 위로했다. 그저 너의 곁에 있었을 뿐,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도 너는 고마워했다.

 

  힘들게 걷는 너를 쫓아다니며 여전히 너를 욕하고, 네게 침을 뱉고, 네게 돌을 던지는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너는 멈추지 않고 걸었다. 차츰 너를 괴롭히던 이들이 줄어들었고, 너를 힐난하던 이들도 네가 걷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너는 아랑곳않고 너의 길을 갔다. 그리고 끝내 너는 네가 걷던 그 길의 끝에 섰고, 웃었다. 

 

  언제부턴가 너를 향했던 폭력과 광기는 가벼운 장난과 애정으로 미화되었고, 너에게 돌을 던지고 너를 파묻었던 이들은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무자비했던 집단폭력이 모두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며 변명했다.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콩까=콩빠'의 논리를 앞세워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부여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위한 면죄부에도 네가 상처받았던 '콩'이라는 단어를 쓸 만큼, 끝까지 잔인했다. 그들에겐 네가 받았던 상처는 중요하지 않았기에, 결국에는 너도 웃었으니 그것으로 되었다며 자신들을 정당화했다.

  나는 그들의 그 허접한 변명과 추악한 면죄부에 구역질이 났다.

 

  그러나 너는 그들을 향해 웃었다, 너의 팬들을 향해 그랬던 것처럼.

  너는 그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너에게 가해졌던 그 폭력의 주체를 너는 모른척했다. 너는 네가 온 몸으로 맞섰던 그 폭력을 그저 운명이 부여한 시련쯤으로 여겼다. 네 상처가 아물어가던 무렵부터 너는 너에게 쏟아졌던 비난과 조롱을 덤덤히 되새김질했고 어느 순간부터는 네 스스로 그것들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기에 이르렀다.

  콩, 콩댄스, 2인자, 3연벙 같은 것들을 웃으며 얘기하는 너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온 몸의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기분이었다. 모든것을 초탈한 표정으로 자신의 가슴에 꽂혔던 비수들을 꺼내어 보이는 너를 보면서 나는 피눈물을 삼켰다. 너를 갈가리 찢어놓았던 그 칼에 무뎌지기까지, 너는 얼마나 굳은살이 배겼어야 했을지 나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너는 너를 갉아먹던 악에 맞서기 위해 더 큰 악이 될 수도 있었지만, 너는 악해지는 길을 택하지 않았고 되려 더 선해지는 길을 택했다.

  그래서 너는 내게 아픈 손가락이었다.

  네가 '악'에 물들었대도 세상 그 누가 너를 비난할 수 있으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끝끝내 '선'으로 남았다. 그래서 나는 네가 아팠지만, 동시에 너를 보며 기뻤다.

  그래서 너는 내게 동화속에서나 나올법한 '절대 선'이었다.

 

 

 

  가끔 생각해보곤 했다. 전쟁 속에서 홀로 동화를 꿈꾸던 너에게, 가장 좋은 결말은 뭐였을까?

  아쉽게 준우승 혹은 4강에 그쳤던 그 모든 경기에서 우승하고, 스타판 역사에 길이 남을 최강자가 되었더라면 좋았을까? 아니면 네가 조롱받고 비난받던 그 모든 과거를 지우고, 네 목표대로 흠집 하나 없이 존경받는 게이머로 남았더라면 좋았을까?

 

  너는 사람들이 멋대로 네 어깨에 지운 '저그의 수장'이라는 짐을 꿋꿋하게 짊어졌고, 네가 몇년간 짊어지고 걸었던 그것을 사람들이 멋대로 빼앗았을 때에도 화내지 않았다. 사람들이 제멋대로 이유를 붙여가며 너를 비난했을 때에도 너는 모든것을 네 탓이라고 여겼고, 사람들이 너를 제멋대로 이용해먹다가 버렸지만 너는 그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너의 결말을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저그의 한을 풀지 못했던 수장, 비운의 프로게이머.

 

  혹자는 네가 무능력한 저그의 수장이었다고 이야기한다.

  누군가는 목동체제를, 누군가는 뮤짤을, 누군가는 3햇 하이브를, 누군가는 완성형 저그의 표본을 남겼으나 너는 저그에게 아무것도 남긴 것이 없다고 얘기한다. 너는 정규리그 우승을 이루지 못한, 끝내 저그의 한을 풀지 못했던 저그라고 얘기한다. 네가 그토록 노력해도 이루지 못했던 것들을 후배 저그들은 너무 쉽게 이뤄냈다며, 너는 수준낮은 저그라고 얘기한다.

 

  혹자는 네가 그저 그런 2인자였다고 이야기한다.

  네가 우승할 수 없었던 이유는 단지 너의 신념이 고지식했기 때문이고 너의 승부욕과 실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얘기한다. 너는 너 개인으로도 모자라 팀에게서도 우승을 빼앗은 불운의 아이콘이라고 얘기한다. 너는 팀에게 우승을 안겨준 적 없는 무능한 주장이자 게이머라고 얘기한다.

 

  그러나 나는 너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너는 저그라는 종족의 시작인 라바 관리의 중요성과 그 기준을 제시한 '저그의 시작'이었다. 너는 저그라는 종족을 가장 제대로 이해하고 있던 '저그의 바이블'이었으며 저그가 가진 공격성을 일깨운 '저그의 왕'이었다. 너는 저그의 한이 아니라, 저그가 무참히 짓밟히던 시절 단 하나였던 '저그의 희망'이었다. 너는 후대 저그들을 위해 저그의 기틀을 닦은 '저그의 선구자'였다. 너의 뒤를 이었던 수많은 저그들은 결국 네가 제시했던 '저그의 시작'에서 자유롭지 못했으므로 너는 '저그의 끝'이었다. 너는 그 자체로 '저그의 혼'이었고, '저그의 모든것'이었다.

  너는 세상 그 어떤 1인자도 줄 수 없는 감동을 준 게이머였으며, 네가 지켜왔던 신념은 고지식한 것이 아니라 '프로게이머의 본질'이었다. 너는 쓰러지고 넘어져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 도전하는 불굴의 아이콘이었고, 단지 우승이 없었을 뿐 기록과 꾸준함 모두 손에 꼽히는 유능한 게이머였다. 너는 이스포츠를 잉태하고, 낳고, 키웠던 양대산맥이었으며 이스포츠를 지탱하던 기둥이었고 이스포츠를 수호하던 신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너의 결말이라고 생각했다, 지니어스 게임을 보기 전 까지는.

 

 

 

  번번히 느꼈던 것이지만, 나는 아주 아둔한 팬이었다. 오랜 시간 너를 지켜보며 너를 잘 안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때때로 너의 본질을 잊었다. 그리고 그 때 마다 너는 내게 너의 본질을, 너의 존재를 증명해보였다.

  너의 폭풍을.

 

  지니어스 게임에서 너는 또다시 내가 잊고 있었던 홍진호를 상기시켰다.

  강한 상대를 피하지 않고 도리어 강자와의 승부를 즐기던, 확신이 설 때 까지 신중하되 승부를 봐야 할 순간에는 폭풍같이 몰아치던, 김구라와의 데스매치가 그랬다. 아무리 불리한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너만의 필승법을 찾아내던, 오픈 패스가 그랬다. 타인의 도움을 받는 유리한 상황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감이고 너는 너의 방식대로 게임하겠다던, 박은지와의 인디언 포커가 그랬다. 단순히 네 패만 생각하며 최선의 수를 찾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가지는 최악의 수를 찾고 그것을 역이용하던, 불리할수록 집중해 치고 나가던, 아주 긴 게임에서도 끝까지 최선을 다하던, 성규와의 데스매치가 그랬다. 남들과 다른 발상과 새로운 방식의 접근으로 게스트들의 찬사를 이끌어내던, 5:5게임이 그랬다. 상대가 너를 도발하고 칭얼거려도 묵묵히 네 승부에 집중하던, 결승전의 인디언 포커가 그랬다. 유리한 상황에서도 네가 해야 할 것을 잊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던, 결승전의 결합이 그랬다. 정해진 길을 고집하지 않고 역발상으로 게임을 풀어나가던, 자리 바꾸기가 그랬다. 남들이 놓치는 사소한 것에서도 게임의 실마리를 잡아내던, 노홍철의 해달별 조언이 그랬다. 게임과 동료에 대한 신의와 소신을 끝까지 지키고자 노력하던, 암전게임이 그랬다. 남들보다 한발 더 앞서 걷고 한계단 더 높은 곳에서 게임하던, 역의 역까지 생각하던, 이은결의 해달별 조언이 그랬다. 아무리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기지를 발휘해 파해법을 찾던, 7계명이 그랬다.

  지니어스 게임의 너는 예전처럼 여전히 그랬다.

 

  너는 여전히 폭풍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너의 결말이었다.

  너의 결말은 아직 없었다. 그리고 너는,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결말 없는 이야기로 남을 것이다. 너는 영원히 소멸되지 않을 폭풍이므로, 네 폭풍의 끝은 없을 것이기 때문에.

  너는 이제껏 그래왔듯이 이따금 한번씩 귀환해 나를 포함한 너의 팬들에게 너의 폭풍이 끝나지 않았음을 알릴 것이고, 무한한 생명력을 가진 폭풍으로 영원할 것이라는 것을 이제 나는 안다. 네가 써내려오던 대서사시는 결코 끝난 것이 아님을, 끝나지 않음을.

  너는 지니어스 게임을 통해 너의 아둔한 팬에게 그것을 증명했다. 이제껏 계속해서 너의 존재와 본질과 가치를 증명했듯이.

 

 

 

  지니어스 게임 시즌1 결승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네가 했던 우승 소감을 기억한다. 너는 말했다, "내가 했던 길들이 절대 틀린게 아니다."라고. 너는 당당하게 네가 걸었던 길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나는 네가 그 길을 걸을 때 의구심을 품었고 네가 그 길의 끝에 섰을 때 아쉬워 했으나, 자랑스러워하는 너의 얼굴과 확신에 찬 너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너의 어리석은 팬은 깨달았다. 너는 옳았다.

  호랑이와 하이에나가 난무했고 벌레들이 들끓었으며 무수한 장애물과 함정이 처음부터 설계되어 있었던 길. 네가 상처 투성이의 몸을 하고서도 묵묵히 끝내 그 길을 걸었던 이유를, 그 길의 끝에서 웃었던 이유를 나는 지니어스 게임을 보고나서야 알았다. 네가 걸었던 그 길이 어떤 길이었는지를.

 

  너는 아주 긴 길을 걸어왔다. 그리고 나는 네가 멈춰서서 웃었을 때, 그 길이 끝난줄로만 알았다. 너의 웃음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그 때엔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저 고행을 끝낸 너의 소회인줄만 알았을 뿐.

  이제는 안다, 너의 그 웃음은 네 앞에 새로 시작된 또 다른 길에 대한 다짐 같은 것이란걸. 그리고 너는 지니어스 게임을 통해 그 새로운 길에 성공적으로 첫 발을 내딛었다.

 

  너는 지금껏 걸어온 길 보다 훨씬 더 많은 길을 가야 할 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 나는 네가 걷기를 포기하거나 중간에 쓰러져버리진 않을까 걱정하지 않는다. 너는 이제껏 그래왔듯이 또 묵묵히 네가 가야 할 길을 갈 것이고, 그 끝에서 결국 웃을 것임을 믿고 있기에.

 

  어떠한 길을 가든, 나의 폭풍을 응원한다.

 

 

 

Will you still love me when I'm no longer young and beautiful?

Will you still love me when I got nothing but my aching soul?

I know you will, I know you will.
I know that you will.

- Lana Del Rey, <Young and beautiful>

 

  나는 네가 은퇴하던 순간까지 언젠가 네가 우승할 날이 반드시 있을 거라고 우겼고 그렇게 믿고 싶었지만, 사실 알고 있었다. 너의 시대는 끝난지 오래였고 너는 끝물을 넘어서 퇴물이 되어 있었다는걸. 그럼에도 너는 위태롭게 그 판에서 버텼고 그래서 나는 끝까지 꿈을 꿀 수 있었다. 누군가는 오기라고 하겠지만 나에게는 의리같은 거였다. 사실 네가 더이상 가망이 없다는 것은 네 스스로 제일 잘 알고 있었을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배들에게 치여 험한 꼴을 보면서도 네가 그 판에서 포기하지 않고 버텼던 것은 그때까지도 너를 응원하던 이들에 대한 일종의 의리였고, 나 역시 그런 너를 끝까지 믿는 것이 그런 너의 눈물나는 노력에 대한 보답이었다.

 

  네가 더이상 젊지 않았을 때에도, 너의 외모가 변하고 너의 손이 굳고 너의 성적이 떨어졌을 때에도 나는 너를 사랑했다. 너보다 젊고 예쁘고 뛰어난 실력을 가진 이들이 쏟아져도 나는 너만을 사랑했다. 네게 남은 것이 상처뿐인 영혼이었을 때에도 너를 사랑했다. 너를 사랑하며 내 영혼도 상처투성이가 되었지만 그래도 나는 너만을 사랑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나는 너를 사랑하려고 한다.

 

 

 

  지니어스 게임의 너를 이야기 하면서 게이머 시절을 더 많이 회고했던 것은, 지니어스 게임의 네가 여전히 '프로게이머 홍진호'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사랑하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너를 보면서, "역시 홍진호는 홍진호구나." 하고 감동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너의 행동에서 애써 네 선수시절의 흔적을 찾지 않아도, 너는 프로게이머 시절 홍진호의 모습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승부에 있어 주저함이 없던 너는, 마지막까지 '프로게이머 홍진호'다웠다.

  그래서 기뻤고, 그래서 고마웠다.

 

 

 

더 지니어스, 홍진호. 아쉬웠지만 너는 최선을 다했고 최고였다. 여기서 끝나지만, Good Game이었다.

 

수고했다, 진호야. 고생했어. 잘 했어.

덕분에 즐거웠어. 고마웠다.

 

사실 화도 나고, 억울하고 분하기도 하지만, 나도 이쯤에서 너처럼 멋지게 GG를 선언하려고 한다.

 

 

 

너는 언제나 폭풍이었고 앞으로도 폭풍이리라 믿는다.

폭풍은 소멸하지 않으며 언젠간 귀환하리라고 믿는다.

잠들지 못하는 밤, 내 청춘에 폭풍을 불러왔던 너에게,

누구보다 선하고 순수했던 너의 폭풍을 사랑한 이가.

 

 

 

GoodLuck, [NC]...YellOw.

GoodLuck, 홍진호.

 

 

 

 

 

 

 

 

 

* 간밤에 비공개로 작성했던 글인데, 조금 수정해 공개로 돌립니다. 혼자 한풀이 하듯 쓴 글이라 의식의 흐름을 따랐고 횡설수설 정신없이 길기만 한, 영양가 없는 글이지만... 혹여 저처럼 여전히 폭풍으로 진호를 기억하고, 앞으로도 진호를 폭풍으로 기억할 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공개로 전환합니다.

* 짧게라도 저와 비슷한 기억, 비슷한 마음, 비슷한 생각이 있다면 댓글로 공유해 주세요. 이 헛헛한 기분 함께 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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